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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색/에세이*시*소설

회색빛 친구 Y

by 별사색 2021. 4. 18.

친구, 출처: Pexels

중학교 3학년 때 난생처음 단짝 친구가 생겼어요. 학교에서만 주로 어울려 놀던 어린이에게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가 생긴 거죠. 하교 후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관심사와 고민, 불안, 꿈 등 무궁무진한 이야기들로 솔직하게 마음을 나누는 솔메이트가 되었어요.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되기 전까지 거의 매일 만날 정도로 정말 마음 많이 주고 좋아했던 친구였어요.

나와 정말 다른 친구였기에 더 끌렸어요. 이상주의자에 구김살 없이 해맑기만 한 나와 달리 세상을 회색빛으로 보는 염세주의자인 까칠이여서 신기하고 더 알고싶었어요. 우리는 어울리지 않은 요상한 조합이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어요. 록음악을 좋아하는 친구 따라 대학가 음악다방까지 가서 뮤직비디오를 보고 오고 한강공원에 나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서로 편지나 선물을 나누기도 하면서 둘만의 특별한 추억을 쌓았어요. 한 번은 대형 사고를 치기도 했는데 다행히 하나는 부학생회장이고 하나는 전교 등수를 다투던 우등생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무사히 넘어갔고 우리만의 흑역사로 남았어요.

그렇게 우정 이상 사랑 언저리 소울메이트였던 친구와 하루도 빠짐없이 어울리다 위기가 있었고 슬픈 결말을 맞이했지요. 그 친구를 편의상 Y라고 부를게요.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할 수 없어 간략히 말하자면, Y에겐 어렸을때부터 친하게 지낸 소꼽친구가 있었는데 중3 때 같은 반이 된 저와 Y가 급격히 친해지자 그 둘 사이가 소원해졌다고 해요. 그러다 Y는 다른 학교에 가고 공교롭게도 저와 Y's소꿉친구가 같은 학교에 배정되면서 친구의 친구에서 그냥 친구가 되었어요. 한동안 저와 잘 지냈는데 Y와 내가 더 친해진 것에 대해 질투심을 가진 그 친구가 Y에게 저에 대해 나쁘게 말을 전했고 결국 일방적인 절교를 당했어요. 너무나 좋아했던 친구라 누군가의 이간질만으로도 친구사이가 망쳐질 수 있다는 걸 도저히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나 봐요. 충격에 빠져 무기력하게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신입생이 새 학교에 적응하고 친구를 사귈 시기에 거의 6개월간 다른 친구들과도 교류하지 않고 고립을 자처하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도 왜그랬는지 어리둥절할 정도로 바보같이 굴었어요. 절교를 선언하는 Y에게 항변 한 번 못하고 어떤 액션도 취하지 못한 채 쇼크로 얼어붙은 채 헤어졌어요. 그 뒤로 그냥 그렇게 혼자만의 동굴에 들어가 있었어요. (너무나 특별했던 친구가 내 말보다 다른 친구의 말을 더 믿는 게 충격이었고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마음이 죽은 거 같아도 어쨌든 학교를 나가고 반 친구들과 같이 밥 먹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다 보니 어느새 제 곁에 함께하는 친구들이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우울한 회색지대에서 혼자 있기'는 허무하게 끝나버렸어요.

헛웃음이 나올 만큼 허탈한 결말이죠.

당시엔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는데.. 지금은 그 친구 얼굴도 흐릿해요. 뭐든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이 맞는 거 같아요. 물론 흐릿해질지언정 끝까지 남는 흉터는 있겠지만요.

아쉬움인지 그리움인지 Y는 아직도 제 기억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가끔 미해결 과제처럼, 해갈되지 못한 그리움처럼 먼지 쓴 기억창고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어서 잊을 만하면 그 아이 생각이 나요. Y는 어디서 어떻게 잘 살고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있는지 등 소소한 궁금증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그리고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지 혹시 Y도 그때 그 일을 후회한 적 있는지 나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나쁜 기억이 아닌 추억으로 남았는지 궁금하네요.

시간이 흘러 이제 중년이 된 우리 둘 다 지금은 더 좋은 친구 사람들이 옆에 있을 거예요. 언젠가 혹시 인연이 되면 다시 얼굴도 보고 옛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려나 작은 기대와 희망을 품어봅니다. 그때까지 부디 건강하고 안전하게 행복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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