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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색/에세이*시*소설

9남매 중 맏이

by 별사색 2021. 4. 16.

외국의 어느 9남매 사진, 출처: Pexels 무료 이미지

9남매 중 맏이인 엄마에게는 아래로 네 명의 여동생과 네 명의 남동생이 있다. 그 당시 9~10남매 정도야 흔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공교롭게도 엄마 아래 두 명까지만 한 배를 빌어 났고 그 아래 여섯은 배다른 형제자매다. 친모인 외할머니 외에도 여럿의 첩을 둔 외할아버지로 인해서다. 단지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다.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본처였고 아들딸 번갈아가며 열 명이나 출산했으나 딸 셋만 살아남았다. 아들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여러 첩들과 그들의 소생까지 돌보며 노비처럼 평생 일만 하셨다. 흥부 부인처럼 줄줄이 자식 건사하며 고된 농사일을 하느라 일찍부터 허리가 굽었다. 풍류 좋아하는 남편 뒷바라지는 당연한 일이고. 그런 외할아버지라도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일찍 사별하셨다.

그래서일까? 맏이인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늘 자신이 아들이 아닌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사셨다. 한편 맏딸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믿음을 대부분 차지했기에 자식들 중 누구보다 외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그리워하신다.

맏이인 엄마는 그렇게 할머니에겐 죄책감을, 할아버지에겐 책임감을 물려받으셨다.

아들 없는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의 책임감 있는 맏이로서 아들 노릇을 하려 애쓰면서 살아오셨다. 부러 사내처럼 산에 나무 베러 가고 어린 동생들에겐 아버지 역할까지 대신할 정도로 말이다.

엄마는 그저 살아남았을 뿐이다. 언니 오빠들이 너무 일찍 떠나서 어쩌다 보니 맏이가 되었다.

 

9남매의 맏딸이라는 죄책감과 책임감으로 자라난 엄마는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학비 등의 뒷바라지를 당연시했다. 특히 어렵게 얻어 귀하게 여기는 아들들, 즉 자식뻘인 어린 남동생들 뒷바라지 말이다.

그런 엄마의 맏딸인 나의 학창 시절, 방 2개인 집에 살 때조차 내방을 가져보지 못하고 늘 삼촌들과 함께 살았었다. 세세한 내용까지는 다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가끔 쓴웃음이 감도는 기억들이 있다.

첫 째 삼촌은 대학을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딸 둘을 혼자 키우는 큰 누나와 살면서 생활비는커녕 조카 용돈 한 번 준 적 없는 사람이었다. 어려서라고 하기엔 일찍부터 사회생활을 했음에도 그러했다. 훗날 그렇게 알뜰하게 모은(?) 종잣돈으로 서울서 집 사고 결혼하고 두 아이를 둔 가장으로 번듯한 사업체까지 운영하며 자리 잡고 나서도 누나들 희생이 당연하다 생각했는지 감사 인사 한번 제대로 안 했다 한다. 부인은 더 부족한 사람을 만나 밑에 어린 동생들도 누나가 돌보는 게 당연하다며 나 몰라라 해서 형제간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런 욕심보는 작은 외할머니를 그대로 닮았다. 9남매 중 막내딸과 밑에 4명의 아들을 낳아서 둘째 부인 자리를 차지한 작은 외할머니는 엄마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을 정도로 젊어서인지 시기 질투가 심해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다고 한다. 욕심 많고 나눌 줄 모르는 성정이라 집에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 자기 방에 쟁여두기 일수였다고. 심지어 아장아장 걷던 내 물건까지 탐내서 나를 울렸던 적이 있었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집안에 분란이 나지 않은 건 모진 팔자에 순응하신 외할머니가 모두 품으셨기에 가능했다. 덕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두 분이 여전히 함께 살고 계신다.

아홉 남매는 다들 장성하고 각자의 가정을 이루었고 그 자녀들이 결혼해서 손주를 볼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4대가 다 같이 모이면 한 장소를 통째로 빌려도 부족할 정도다.

일제강점기를 기억하시는 외할머니는 한 세기를 걸쳐 생존하셨고 맏딸인 엄마도 칠순이 넘었다. 거동이 불편하신 외할머니는 이제와 후회하신다.

운명이라 순응하며 희생하고 감내한 본인의 인생을 자신이 낳은 세 자매에게까지 강요했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그로 인해 집안에 얼마 되지 않은 땅과 재산조차 모두 아들들에게 양보하라 하였던 과거를 후회하신다. 

물론 어미를 닮아 욕심 없는 세 자매는 지난 일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있지만 이를 모두 알게 된 손녀 입장에서 가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작은 할머니 자손들은 각자 집을 여러 채 소유할 만큼 부를 축적한 반면 본인 친자인 세 자매는 살림살이가 빈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얼마 전 할머니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세 자매만 쏙 빼고 자기들끼리 나누었다고 하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구나 싶다. 

세 자매가 아직 젏은 시절, 밑에 줄줄이 딸린 어린 동생들 때문에라도 할머니가 농사지은 쌀 한 섬, 직접 담근 고추장조차 욕심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양보하고 사는 게 당연하다 가르친 할머니의 뜻에 따랐던 것이다. 100세가 넘어 귀 멀고 눈멀고 거동까지 불편한 할머니의 때 늦은 후회와 회한이 안타까운 이유다.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이라도 아쉬울 법한데도 세 자매는 이번에도 그러려니 순응하였다. 동생들의 괘씸한 행태를 알고도 묵인해 주었다. 가난할지언정 욕심부리지 말고 분란 만들지 말고 우리끼리 화목하게 잘 지내자 의기투합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세 자매는 모이기만 하면 웃음꽃을 피우며 여전히 서로에게 다정다감하고 없으면 못 사는 단짝들이다. 그들의 자식들도 모두 평안하고 각자의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가며 자식에게 헌신한 부모를 빛나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어쩌면 진정한 행복은 세 자매의 끈끈한 우애와 그들 자식과 더불어 화목한 관계가 아닐까?


중년이 된 나는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봤다.

머지않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 9남매들은 양분 되거나 흩어질 것이다. 가족의 구심점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할 이도 없으니 당연한 수순 이리라. 

물론 여전히 아버지 대신이라 생각하는 맏딸이 존재하니 9 남매간 교류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3대, 4대가 함께하는 대가족 모임은 어려울 터. 자식 세대의 교류 역시 자연스럽게 소원해지리라.

이미 오래전에 예정되었다. 피가 섞였으나 남보다 못한 사람들과의 단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어느 대가족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핵가족화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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