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 나지 않는 죽음
얼마 전, 사회초년생일 때 만나 20년 가까이 알고 지냈던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췌장암이었다. 발견이 늦어 손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코로나로 병문안조차 안 되는 상황이라 전화만 몇 번 하고 나중을 기약하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부고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였다. 실감이 나지 않는 죽음이었다. 아직도 휴대폰엔 언니의 사진이 남아있고 전화 앱을 열어 통화버튼을 누르면 여느 때처럼 "안녕~ 잘 지냈어?"라고 대답할 거 같다. 아픈 것을 직접 내 눈으로 본 게 아니어서 더 거짓말 같다. 누가 짓궂은 만우절 농담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가 갈수록 몸상태가 예전과 달라 조금만 무리해도 피곤하고 여기저기 슬슬 결리고 안 아픈 곳이 없는 게 신체가 나이 들어가는 증거라지만 일상이 되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그러다 어느 날 누가 아프다더라 세상을 떠났다더라 소식이 전해져 오면 그제야 깨닫게 된다. 우리 곁에 죽음을.
날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죽음이 우리 삶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공평하게 죽음을 앞두고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재확인하는 것이다. 특히 가까이 존재했던 사람의 죽음은 고통스러운 상실감과 함께 벼락같이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던진다. 마치 몰랐던 것처럼, 그동안 막연히 멀게만 느꼈던 죽음을 가깝게 실감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그러니까 나 또한 피해 갈 수 없는 마지막이 닥칠 거라는 당연한 진실을 현실로 느끼고 받아들이게 된다.
뒤이어 찾아오는 것은 두려움이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숨 막히게 무섭다. 끝이라니. 아직도 나에겐 못 해본 일이 산적해 있다는 한탄과 아쉬움이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너울댄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가보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 등등 못 다 이룬 위시리스트가 펼쳐지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소리치고 싶어 진다. 들어주는 이가 없더라도 울분에 차 막말을 내뱉고 싶어 진다. 그냥 억울해서다.
그리고 복잡한 감정의 북받침이 사그라들면 차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호흡하고 심장이 뛰고 생각하는 내가 아직 생생히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누군가의 죽음이 되려 나에겐 생생한 삶을 깨닫는 불씨가 되었다.
내 생애 강렬한 첫 죽음
기시감이 든다. 내 생에 가장 강렬한 첫 '죽음'은 중학교 2학년 체육대회날이었다. 장거리 달리기를 끝내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선생님께 전해 들은 소식은 아빠의 임종이 코 앞이니 서둘러 병원에 오라는 호출이었다.
땀에 젖은 체육복을 갈아입을 정신도 없이 내달려간 병원서 의식 없는 아빠의 얼굴조차 못 보고 끝이었다. 입원한 지 열흘만에 허망한 죽음이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망연자실 서있어야 했고 내내 숨이 찼고 순식간에 모든 것은 그렇게 물속에 빠진 듯 혼곤하게 흘러갔다.
채 머리가 여물지 못한 당시의 기억은 흐릿하다. 다만 몇 가지 장면은 기억하고 있다. 온통 검은 옷차림의 어른들이 넘쳐나던 장례식장에서 나 혼자 외떨어져 종이에 그려진 피아노 건반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피아노 시험이 예정되어 있기도 했지만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어린아이로 퇴행한 느낌이었다. 무엇보다도 실감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마 계속 부정했던 거 같다. 아빠와 영원한 이별을 하고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모든 일들이, 번잡한 어른들의 모습까지 딴 세상 같고 나와 무관한 일 같았다. 장지행 버스에 실려가 아빠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구슬픈 울음소리만이 선명하다. 그때서야 진짜 이별을 깨달았던 거 같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많은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때를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임을 알면서도 어리석게도 매번 헤어 나올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아빠와 눈 마주치고 마지막 인사조차 나눌 수 없었던 이별이 두고두고 사무치게 안타까웠다.
죽음은 그렇게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유종의 미 따위 준비할 새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안녕'이라는 인사조차 할 수 없이 말이다. 지금 이 순간도 삶과 죽음 그 사이 어딘가 경계에 서있다. 우리가 의식하든 안 하든 어김없이 맞닥뜨려야 할 숙명인 것이다.
끝이 정해져 있기에 더 소중한 삶
누군가 말했다. B(Birth,탄생)와 D(Death,죽음) 사이에는 오직 C(Choice,선택)가 있다고.
살아 있는 모든 존재가 그러하듯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 사이 우리는 수많은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생을 완성해간다. 나 홀로 이불 킥과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하고 반복되는 뉘우침 속에 성장해나가면서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찬란한 기쁨과 몰입, 통찰의 순간에는 영원을 사는 것처럼 특별함을 느끼기도 한다. 희로애락이 씨줄과 날줄처럼 무수히 교차한다.
끝이 있기에 지금의 삶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다시 돌이킬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을 애쓰며 살고자 한다. 작은 일상도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누군가는 생을 마감하고 슬퍼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동안 어떤 이는 살아갈 날을 고민하고 또 어떤 이는 TV를 보고 배가 고파 밥을 챙겨 먹으며 일상을 이어간다.
언니의 부고를 듣는 순간에 난 배가 고파 치킨버거를 우적우적 씹던 중이었다. 햄버거 가게 매장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부끄러움도 모르고 한참을 울었다. 서럽게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고 남은 음식을 마저 먹고 밖으로 나오자 유난히 볕이 좋은 날이었다. 다시 또 눈물 날 거 같은 걸 참고 남은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심하게 체해서 저녁은 굶어야 했다.
우울하고 더부룩해서 가라앉은 기분이 며칠 동안 이어졌으나 체기가 사라지고 난 다시 TV 예능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있는 스스로를 알아챘다. 조금 미안하지만 이 마저도 곧 기억 저편으로 소실되리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명제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어쩌면 먼저 간 사람들의 몫까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맹목적인 의무감까지 껴안아야 할지도 모른다.
또 어느 날, 허투루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라 경고하듯 우리 곁의 죽음이 스쳐 지나갈 수 있다. 코 앞에 닥치는 그 순간까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끝을 잊지 않는다면 매일매일 우리 앞의 생이 보너스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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