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한 건 초등학교 2학년이던 9살 여름 즈음이었다.
하교 길에 집을 코 앞에 두고, 양방향 2차로를 건너던 중 서행하던 자동차에 치였다. 불행 중 다행인지 가족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던 차였고 실려가는 내내 쇼크로 정신 못 차리고 부들부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병원입구에서 응급 침상에 눕혀져 옮겨지면서 그때서야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을 깨닫고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몸이 자동차에 치여 붕 떠올라 찻길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것에 비해 가벼운 찰과상으로 끝났다. 커다란 책가방 덕분에 뇌진탕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 이후 5학년 때 우연히 보게 된 석가모니 만화책을 통해 다시금 '죽음'이라는 필멸(必滅)에 대한 강렬한 두려움을 느꼈다. 한 해 한 해 시간이 흐를수록 복합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시작됐다.
중학생 때까지 한동안 죽음에 심취했었다. 어쩌면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체를 알고 싶었던 것 같다. 죽음의 의미에 대해, 그저 끝이 아니라 그 너머 의미와 가치 있는 무언가가 더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중학교 2학년 갑작스러운 아빠의 암투병과 영원한 이별을 시작으로 회사 동료, 지인들이 사고 또는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간접 경험했었다. 늘 남의 일이라 생각했던 막연한 두려움이 언젠가 반드시 내게도 닥칠 현실임을 깨달아가고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어차피 혼자다.
일 평생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고 충만한 삶을 살면서 가족을 이루고 부와 명예를 높이 쌓았어도, 수많은 인연과 은덕을 쌓았어도 죽음은 피할 수 없다. 나 홀로 끝에는 맨 몸뚱이조차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무(無)로 돌아간다. 순수한 영혼이 있다면 천국에 갈 수도 있겠으나 내 이름과 존재는 사라진다.
물론 역사에 기록될 만한 업적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남을 수도 있겠으나 나라는 존재는 소멸한다. 완전한 마침표, 종말을 맞이한다.
지구별 생명들 중에서 길지도 짧지도 않은, 백 년을 사는 인간의 삶은 덧없다 느껴지기도 한다. 장자의 말처럼 인간의 생(生)은 소풍 같은 시간일 수도.
살아갈 날이 더 많았던 치기 어린 젊음이 지나가고 남은 시간이 줄어들수록 세상과 만물,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한다. 바깥세상의 화려한 겉옷을 벗고 내면의 성찰에 집중하게 된다.
나라는 존재가 티끌 같다는 깨달음 뒤엔 하나의 욕망이 유독 선명해진다. 이대로 사라지면 허무함과 미련이 한가득 남을 거 같아 세상에 다녀간 흔적 하나 남기고 싶어진다. 눈에 보이고 증명할 수 있는 물질의 차원을 뛰어넘어 잴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계기가 된다.
내 유전자가 이어진 자손과 후손들, 더 나아가 다음 세대와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걱정하게 된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한 욕망이 되어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나 중심에서 타인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관심의 축이 달라진다. 지구별과 소외되고 약한 자들에게 관심이 확장된다.
보여주기식 허영이 아니라 진심인 이유는 삶의 끝이 실감 나는 순간에 비로소 갇혀있던 알을 깨고 나왔기 때문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나밖에 모르던 작은 세상을 벗어나 드디어 더 넓고 높고 깊은 시선을 갖게 된다.
그 과정에서 초라한 내 모습에 실망하고 좌절할 수도 있겠으나 머지않아 커진 세상에 맞춰서 성장과 성숙의 길로 나아간다.
공자가 <논어(論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40세 불혹(不惑)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 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 '마흔 살'을 거쳐 50세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알게 되어, 자신의 본분과 역할을 깨닫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이를 지나, 60세 이순(耳順)에 이르러 남의 말을 듣기만 해도 이해하게 되고, 70세 종심(從心)-종심소욕(從心所欲 :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았으되) 불유구(不踰矩 : 법도에 어긋나지 않다) 하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일까.
필연적으로 실패와 좌절을 겪을 것이고,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지만 성공의 단맛에 취할 때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이유는 할 수 있는 게 그저 계속하는 것일 뿐, 그 끝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종말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끝을 실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달관자가 된다. 나를 둘러싼 세상 속에 치열하게 싸우고 버둥댄 모든 절박한 행위의 목적과 이유를 완전히 다른 시선과 차원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온 세상의 중심이 나여야만 했던, 소수의 내 사람과 조직만을 위했던 욕망과 욕구가 변화한다. 죽음을 통해 스스로 바닷가 모래알, 우주 먼지임을 깨닫자 찾아오는 허무함, 무의미함, 절망에 몸부림치는 동안 이타적인 존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달관하고 성찰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희생마저 불사하기도 한다. 그때서야 나답게 있는 그대로 사라져도 괜찮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 일조할 수 있다면 그 누가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아무개라도 상관없다. 이미 추구하는 목적과 의미와 가치를 획득했을 터이니.
그렇게 스스로 존재 가치를 자신의 뜻과 의지에 따라 재정립한다. 비로소 완전한 소멸마저 더는 두렵지 않게 된다. 기꺼이 끝을 받아들이는 경지에 이르리라.
여전히 소심하고 즉물적이며 덜 여문 나에게도 그렇게 완전무결한 종말이 찾아오기를 바란다.
덧붙여 말하자면 내가 꿈꾸는 종말은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지구별의 일부로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다.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듯 윤회의 고통(고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상태, 해탈(解脫) 그 자체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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