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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색/에세이*시*소설

상처입은 어린 아이ㅣ사랑의 매

by 별사색 2022. 9. 19.

 

신난 아이, 출처: Pexels 무료이미지

엄마도 나이가 드셨는지 이따금 맥락없이 과거의 얘기를 들려주신다. 어떤 계기로 생각이 난 건지 알 수 없으나 별 일 아니라는 듯 지나가는 가벼운 말투로 말이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같아 도통 믿어지지 않지만 걸어서 왕복 4시간씩 통학했다던 전라도 깡시골에서 자란 엄마가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개구쟁이 시절 이야기들이 참 재밌다.

얌전하고 단정한 처녀가 되길 바랬던 외할머니의 바람과 정반대였던 엄마는 겁없이 무전여행을 다니고 친구들과 사고치면 앞장 서기 일수인 천방지축 말괄량이로 이름 날렸던 일화들이 이야기보따리처럼 툭툭 튀어나온다. 개구진 어린 시절 내내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수시로 매질을 당하였는데 매번 잘 도망갔다가 걸려서 두 배로 맞았던 에피소드가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다.  그밖에도 엄마가 생생히 들려준 사고뭉치 일화가 무궁무진하다.

이야기를 듣던 중 떠오르는 상념들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그래서였다. 할머니에게 모질게 맞고 자란 게 한이 된 엄마는 두 딸에게 손지검 한 번 안 하셨다. 벌을 서거나 혼난 기억은 무수히 많아도 엄마가 손이나 회초리 등을 이용해 직접 매를 때린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십대였던 당시에는 인권 개념이 전무하다시피했기에  집안에선 부모에게 맞고 학교에선 선생님이 체벌하는 걸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자라는 동안 체벌하지 않는 엄마의 양육방식이 특별했다는 것을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엄마는 내가 무얼 하든 믿고 응원해주었다. 아빠 없이 자랐어도 마음에 빈 곳이나 그늘 없이 자존감 높은 아이로 자란 이유가 아닐까.

심지어 사고를 쳐도 무작정 혼내기 보다 먼저 침착하게 사정을 듣고 수습하고 난 뒤에야 잘잘못을 따져 훈육을 하셨다.

어떤 경우에도 일단 나를 무조건 믿고 지지해주되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엄히 혼내더라도 마무리는 꼭 품에 안아주셨다.

기억을 잘 못하기도 하지만 천방지축 어린 시절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잘못했을 때 벌 선 기억은 많지만 엄마에게 매맞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내 친구들만 보아도 성장기에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집에서 부모에게 맞았던 경험들이 수두룩했다. 당시 학교에선 학생지도를 위해 선생님이 체벌용 막대기를 수업에 들고다니고 수업 중에 매질조차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나중에 엄마가 말해주셨다. 여성으로서 몸가짐과 차분한 성격에 대한 기준이 엄격하셨던 외할머니는 유독 장녀인 엄마에게 심하게 단속하고 타박하고 서슴없이 매질을 하셨다고 한다. 풀어 놓은 말처럼 천방지축 날뛰며 들과 산으로 노니며 사내아이 같이 자란 엄마를 외할머니는 용납할 수 없었던 거 같다. 그래서 엄마의 어린 시절은 이해받지 못하고 매맞고 혼나기만 해서 조금은 억울하고 속상한 기억이었나 보다. 외할머니와 둘이서만 살던 시기에 해묵은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해 많이 싸우고 대화하며 갈등과 봉합의 시간을 보냈다고도 했다.

어쩌면 엄마가 그동안 마음 속에만 담아두었던 속상한 마음을 털어냈기에 이런 대화가 가능한 거 아닐까. 지금은 이렇게 내게도 가볍게 그 때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정도로 엄마 마음 속 상처입은 어린 아이를 잘 달래었기에 말이다.

 

그런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성장기를 돌아보았다. 말썽 피우기라면 동네 아이들 누구에게 지지 않을 만큼 개구쟁이였던 시절의 나였기에 내가 엄마였어도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딸만 둘인 상황에서 어린 동생 돌보기보다 밖에 나가 놀기 바쁜 말성꾸러기 때문에 속도 까맣게 태우시고 고집 센 안하무인 악동을 훈육할 때마다 외할머니처럼 때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 치셨을까. 

 

내가 엄마였다면 기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때리고 또 때렸을 성 싶을 때가 많았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고 죄송하고 엄청난 인내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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