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곳곳에 눈이 쌓여있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외출 중이던 엄마는 집 근처 왕복 2차선 도로 앞에 겉옷도 없이 구걸하는 걸인에게 선뜻 본인의 겨울 외투를 벗어주었다고 한다.
집 근처이기에 집으로 되돌아가 다른 옷을 입고 나오면 된다는 생각이었겠지만 쉽지 않은 선택이다. 겉옷을 벗어주면 본인이 당장 추위에 노출되는 것이니까.
나라면 일단 다시 집에 들어가 걸인에게 줄 옷-안 입고 버린 셈 칠만한 것-을 따로 챙겨 와서 줄 지언정 그렇게 즉각적으로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줄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다.
착하게 베풀며 살아온 천사표 엄마는 좋은 의미로 참 어른일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망설임 없이,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아무리 부자여도 쉽지 않다. 심지어 엄마는 본인이 못 먹고 못 입어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어린 시절 기억을 끄집어내면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고구마 캐 듯 줄줄이 딸려 나온다.
내가 국민학교(여기서 연령대가 드러남^^)를 다니던 시절엔 못 먹고 못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거지들이 많았다. 그런 동네 거지들을 불러 집에서 밥을 내어주기 예사였고 길을 걷다 걸인이 보이면 엄마는 늘 고사리 같은 어린 딸들 손에 천 원씩 쥐어주어 직접 기부하게 만드셨다.
그래서 지금도 기부금 상자를 보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눈에 뜨이면 자동 반응처럼 마음과 몸이 쏠린다. 내가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작은 선의가 저절로 생겨난다. 나눔에 대해 부담 없이 가볍고 쉽게 실행할 수 있는 건 '기버 giver'로 살아온 엄마를 보고 자라 서다.
물론 수중에 돈이 없거나 당장 도와줄 수 없는 여건에 지나친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성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시민이므로 아주 조금의 마음 조각을 가능할 때 베풀 뿐이다.
어쨌거나 보고 겪어왔기에 그런 엄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난 내가 제일 중요해서 내가 필요한 것까지 양보할 만한 그릇은 아니다. 여유가 있고 남아야 줄 수 있는 정도니까.
그래서 입고 있는 옷도 벗어주는 엄마가 신기하고 존경스러우면서도 한심하고 바보 같고 때론 원망스럽다.
살아오면서 특히 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었으니까.
혼자서 두 딸을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는 엄마는 과일 가게를 하면 손님들이 요구하는 덤이나 외상을 거절하지 못해 망하기 일쑤였다. 늘 자신보다는 타인에게 양보하고 배려하고 자신이 먹을 것까지 나누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철저히 '테이커 taker'에게 이용당한 '호구'에 가까운 '기버 giver'인 엄마는 늘 사기를 당하고 돈을 떼이곤 했다. 친구라는 사람에게 조차 비싼 이자의 일수를 써야 했다. 주머니가 가벼울 뿐 자존심 강한 엄마는 밤 중에 버스 탈 차비가 없어 걸어 다니면서도 주위에 도움조차 청하지 않으셨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어도 매번 그냥 넘어가지 않고 반드시 적은 돈이라도 기부하려고 하셨다. 각종 기부금 모금 방송이나 길거리 모금 행사 참여는 예사고 사람들에게 음식 대접이나 물건 나눔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일상이시다.
딸 입장에서 그런 엄마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몇몇 '테이커 taker'를 끊어내지 못해 얼마 없는 재산마저 다 털리고 수시로 손해 보는 엄마의 기구한(?) 인생이 안타깝고 또 원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쉽게 사람을 믿고 양보하다 손해를 자처했다고 엄마를 탓할 수 있을까.
딸이 아닌 제삼자의 눈으로 봤을 때, 엄마의 인생은 불쌍하고 가엽기 그지없다. 눈물 없인 볼 수 없을 정도로 신파가 따로 없다.
엄마에게 반한 아빠가 납치하다시피 밀어붙인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둘째 딸을 임신했을 때 이미 바람 난 남편이 집에 오지 않아 혼자서 어린 자식들을 돌봐야 했다. 결국 이혼 후 홀로 두 딸아이를 돌보며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을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버리지 않고 키워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어렵게 재결합한 뒤 친조부모까지 다 함께 한 집에서 행복해질 줄 알았다. 일 년도 채 안 돼 아빠가 갑작스럽게 병사했고 사업하던 아빠가 남긴 재산을 모두 친가에 빼앗겼다. 두 딸과 함께 빈손으로 내쳐진 뒤에도 엄마가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물러난 건 아이들의 친가와 척지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다. 결국 욕심 많고 심보 고약한 친가와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지만. 이제와 나쁜 사람들이었다고 넌지시 말하던 엄마는 늘 그렇듯 속도 없이 웃어넘기고 만다.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을 상황에서 묵묵히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했던 엄마는 부족해도 나누며 살아왔다. 자식뻘인 어린 동생들까지 거두어 돌보기도 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봐도 우리 세 가족만 살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면 믿으려나.
그런 엄마의 지난한 과거를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50년대에 태어나 자란 70대의 엄마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최빈국에서 70년 만에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이 지나온 격동의 근현대사를 써내려 온 주역이다. IMF까지 극복한 엄마 세대의 고단했을 과거는 폭풍 속에 거침없이 쓸리고 떠밀리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리라.
40대인 나의 20~30대가 아무리 힘들었어도 엄마 세대의 그늘 아래 그들의 보호가 우산이 되고 울타리가 되어 늘 존재했으니까. 그래서 가난했지만 덕분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하고 재밌는 건, 겨울 외투를 벗어준 그날 이후 엄마는 평생 동안 옷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셨다. 마치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100% 엄마 입장에서 주관적 의견일 뿐이지만.
나 또한 돌이켜 보면 베풀기 좋아하는 천사표 엄마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과 도움과 선의를 무수히 많이 받았다. 아빠의 빈자리를 못 느낄 만큼 주변에 다정한 이웃사촌, 삼촌과 이모들이 늘 넘쳐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호의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가치가 있다.
혼자일 때도 외롭지 않고 내가 누군가를 도우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돕고 그런 선의가 선순환해서 언젠가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라는 믿음. 이건 엄마가 나에게 체득하게 만든 당연한 가치였다.
어쩌면 내가 가진 건 쥐뿔도 없지만 늘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근본이 아닐까?
ㄴ
이건 모두 엄마의 유산이다. 그래서 덕분에 감사하다. 비록 돈은 없어도 마음만은 넉넉한 것까지. 더불어 현재는 더 이상 배 고프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할 수 있으며 욕심만 내려놓으면 충분히 만족스럽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기에 더 바랄 게 없다.
부디 엄마를 비롯한 우리 부모 세대에게 남은 여생이 편안하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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