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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사색/에세이*시*소설

엄마의 겨울 외투ㅣ가진건 쥐뿔도 없지만 행복한 이유

by 별사색 2022. 10. 30.

사진 출처 Pexels 무료이미지

오랜만에 지난 시간 속 감사한 것들을 뒤적거렸다.

 

매일 쓰려고 했던 감사일기는 생각만큼 쉽게 습관이 되지 않았다. 물론 감사했던 일을 매일매일 되짚어보고 고마운 마음으로 시작한 하루가 얼마나 의미 있고 더 감사할 일들로 채워지는지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꾸 까먹게 된다. 매번 0에서 리셋되는 게임 속 세상처럼 말이다.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이 계속 상승해야 하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0부터 시작해야 된다면 얼마나 실망스럽고 막막할까.

 

다행히 인생은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는 일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실패나 재난으로 가진 걸 모두 잃거나 심지어 마이너스(적자)가 될 수도 있다. 그건 말 그대로 재물이나 돈과 같은 물질적 대상이나 외부조건일 뿐이다.

 

돈이란 건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단지 신용을 담보로 서로의 가치 기준에 따라 교환하거나 잠시 보유할 수 있을 뿐이다. 재물과 재화는 필요에 의해 있거나 없을 뿐이지.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다이아몬드는 길가에 돌처럼 가치 없는 물건이거나 때론 재앙일 수도 있다.

 

최근 들어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머리가 쥐가 날 정도로 골똘히 생각에 몰두했다.

 

왜 나는, 우리 가족은 풍요로운 시대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명품과 슈퍼카, 고급주택 등 휘황찬란한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음 달 카드값과 돈 걱정하지 않는 경제적 자유로움을 느낄 날이 오긴 할까. 아마도 이건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의 고민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 대한 원망이나 세상 탓을 하려는 게 아니다. 재산이나 부를 축적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도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돈과 금융에 대한 지식도 소양도 부족했던 탓에 스스로 경제적 안정을 이루지 못한 게 다. 단지 소처럼 일하고 과소비는커녕 그 흔한 명품 한 번 사본적 없는 소시민으로서 의구심에 가깝다. 나와 떼어낼 수 없는 가족들까지 서로 연결된 삶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어 떼어낼 수 없었던 가난함에 대해 순수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에 대해 정리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가장 큰 원인은 엄마와 나 둘 다 최근까지 빚 갚기 급급했고 모아놓은 재산도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니 돈을 모으려면 계속 쉼 없이 일하고 허리띠를 졸라매 아끼고 모아 저축이든 투자든 해야 마땅하다.

 

소처럼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기본 전제를 모르는  아니다. 아는 것과 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둘 다 비정기적으로 일하고 있다. 고정 수입 없이 생활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랄까. 적게나마 엄마의 연금 일부와 약간의 비정기적 수입과 주위의 도움-엄마 지인들의 식료품(쌀, 야채, 과일 등) 나눔-으로 현재까진 우리 모녀가 빚지지 않고 살고 있다.

 

남는 건 없어도 유지가 가능한 건 생활비를 최소화하고 추가 아르바이트로 매달 조금씩 부족분을 충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 아닌 지방이기에 상대적으로 생활비가 적게 든다고 해도 각종 공과금, 보험료와 의료비, 통신요금, 최소한의 생필품 구입비, 주로 외식비용으로 지출하는 카드값까지 매달 고정지출이 뻔한데. 이걸 어떻게 충당하고 있는지 처음엔 신기했다. 논산에 내려와 처음 3개월을 보내고서야 이게 가능함을 알게 됐다. 공산품을 거의 사지 않고 채식 위주의 식단이라 식비와 생필품 비용이 적어 고정지출이 도시에서 살 때보다 현저히 적게 든다. 농사짓는 주위 분들이 시시때때로 식료품을 나누는 경우가 많고 품앗이나 물물교환 등을 통해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이 살기에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게 잘 지내고 있다. 그렇게 거짓말처럼 모녀가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적게나마 이웃과 나누는 기부나 봉사활동도 가능하다.

 

서울에서 월화수목금금금 7일 내내 과로에 시달리던 일이 꿈같다. 욕심을 내려놓고 덜 일하고 덜 버는 대신 자유로워졌다.

 

다만 몸은 편한 대신 죄송함이 컸다. 사지 멀쩡한 딸내미가 돈 모을 생각은 않고 태평하게 놀고 있으니 말이다. 프리랜서라고 말 하지만 실제론 백수나 다름없다.

 

어느 정도 생활이 유지가 돼서 무책임하게 모른 척 외면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무얼 해도 잘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우울하고 한 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아 있었다. 도저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눈감고 자빠져 있었다. 엄마에게 모든 부담과 책임을 떠넘기고 나 몰라라 손 놓고 있었다. 어떤 의욕도 의지도 희망도 없이 모든 걸 놓아버리고 흔적 없이 사라지고만 싶었다. 죽지 못해 살아있을 뿐이었다.

 

세상이 밉고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그중 가장 미운 건 나 자신이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엄마 때문이라는 핑계를 방패 삼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뒤늦은 오춘기에 몇 년간 지독한 마음의 감기, 우울에 시달렸다.

 

사실 겁이 났다. 다시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걷거나 뛰지 못할까 봐 지레 겁먹고 두려웠다.

 

두 다리가 제대로 설 수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도 못한 채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었다. 볼썽사나운 못 볼 꼴이었다.

 

스스로 겁쟁이라고 욕하고 정신 차리라고 다그치지만 겉으로만 그럴 뿐이었다. 진심은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흐르는 시간을 그저 지켜보며 모든 욕망으로부터 거세당한 스스로를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아니 실제 거세당한 게 아니라 그런 척 믿고 싶었는 지도.

 

그러면서도 소비하는 인간으로서 자원을 쓰고 쓰레기를 만드는 건 단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말 쓸모없고 하찮아 지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마음 한편, 감당하기 벅찬 커다란 꿈을 품고 그 꿈에 짓눌렸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감나무에 감이 익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어이없게 감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고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말이다.

 

요행을 기대하고 누군가 그리 해주기만 바라며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쭉 써 내려가 보고 나서야 깨닫는다. 정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잉여인간에서 인간쓰레기 직전까지 갔구나 싶다.

 

지금까진 엄마와 가족에게만 민폐를 끼쳤으니,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 걸까.

 

철 모르던 어린아이 일 때도 몹쓸 생각-남의 것을 탐하거나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빼앗을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이상주의자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사소한 거짓말도 가능하면 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스스로 바르고 당당하게 살려고 애써왔다. 완전무결하게 성인군자처럼 살아왔다고 말할 순 없겠으나 적어도 '법 없이도 살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기버 giver'로 살아온 엄마를 보고 자라 서일 것이다. 물론 '테이커 taker'를 끊어내지 못해 가진 재산을 다 털리고 버려지던 엄마의 기구한(?) 인생이 안타깝고  원망스럽지만 온전히 본인 탓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착하게 베풀며 살아온 천사표 엄마는 좋은 의미로 참 어른일 것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망설임 없이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아무리 부자여도 쉽지 않다. 심지어 엄마는 본인이 못 먹고 못 입어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거리 곳곳에 눈이 쌓여있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외출 중이던 엄마는 집 근처 왕복 2차선 도로 앞에 겉옷도 없이 구걸하는 걸인에게 선뜻 본인의 겨울 외투를 벗어주었다고 한다.

 

 

 

집 근처이기에 집으로 되돌아가 다른 옷을 입고 나오면 된다는 생각이었겠지만 쉽지 않은 선택이다. 당장 겉옷을 벗어주면 본인이 추위에 곧장 노출되는 것이니까.

 

나라면 일단 다시 집에 들어가 걸인에게 줄 옷-안 입고 버린 셈 칠만한 것-을 따로 챙겨 와서 줄 지언정 그렇게 즉각적으로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벗어줄 수 있을까 신기할 정도다.

 

지금도 어린 시절 기억을 끄집어내면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고구마 캐 듯 줄줄이 딸려 나온다.

 

내가 국민(초등)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못 먹고 못 입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거지들이 많았다. 그런 동네 거지들을 불러 집에서 밥을 내어주기 예사였고 길을 걷다 걸인이 보이면 엄마는 늘 고사리 같은 어린 딸들 손에 천 원씩 쥐어주어 직접 기부하게 만드셨다.

 

그래서 지금도 기부금 상자를 보거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눈에 뜨이면 자동 반응처럼 마음과 몸이 쏠린다. 내가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작은 선의가 저절로 생겨난다.

 

물론 수중에 돈이 없거나 당장 도와줄 수 없는 여건에 지나친 경우도 많다. 나 역시 성인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시민이므로 아주 조금의 마음 조각을 가능할 때 베풀 뿐이다.

 

어쨌거나 보고 겪어왔기에 그런 엄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난 내가 제일 중요해서 내가 필요한 것까지 양보할 만한 그릇은 아니다. 여유가 있고 남아야 줄 수 있는 정도니까.

 

그래서 입고 있는 옷도 벗어주는 엄마가 신기하고 존경스러우면서도 한심하고 바보 같고 때론 원망스럽다.

 

살아오면서 특히 학교 다니던 시절 우리 집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었으니까.

 

혼자서 두 딸을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는 엄마는 과일 가게를 하면 손님들이 요구하는 덤이나 외상을 거절하지 못해 망하기 일쑤였다. 늘 자신보다는 타인에게 양보하고 배려하고 자신이 먹을 것까지 나누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철저히 '테이커 taker'에게 이용당한 '호구'에 가까운 '기버 giver'인 엄마는 늘 사기를 당하고 돈을 떼이곤 했다. 친구라는 사람에게 조차 비싼 이자의 일수를 써야 했다. 없이 살아도 자존심만 세서 본인은 밤 중에 버스 탈 차비가 없어 걸어 다니면서도 주위에 도움도 청할 줄 모르는 미련 곰탱이.

 

딸이 아닌 제삼자의 눈으로 냉정하게 봤을 때, 엄마의 인생은 불쌍하고 가엽기 그지없다. 눈물 없인 볼 수 없을 정도로 신파가 따로 없다.

 

엄마에게 반한 아빠가 납치하다시피 밀어붙인 결혼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둘째 딸을 임신했을  이미 바람 난 남편이 집에 오지 않아 혼자서 어린 자식들을 돌봐야 했다. 결국 이혼 후 홀로 두 딸아이를 돌보며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을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버리지 않고 키워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 어렵게 재결합한 뒤 친조부모까지 다 함께 한 집에서 행복해질 줄 알았다. 일 년도 채 안 돼 아빠가 갑작스럽게 병사했고 사업하던 아빠가 남긴 재산을 모두 친가에 빼앗겼다. 두 딸과 함께 빈손으로 내쳐진 뒤에도 엄마가 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물러난 건 아이들의 친가와 척지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다. 결국 욕심 많고 심보 고약한 친가와 인연이 끊어지게 되었지만. 이제와 나쁜 사람들이었다고 넌지시 말하던 엄마는 늘 그렇듯 속도 없이 웃어넘기고 만다.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을 상황에서 묵묵히 혼자 모든 걸 감당해야 했던 엄마는 부족해도 나누며 살아왔다. 자식뻘인 어린 동생들까지 거두어 돌보기도 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봐도 우리 세 가족만 살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면 믿으려나.

 

그런 엄마의 지난한 과거를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50년대에 태어나 자란 70대의 엄마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최빈국에서 70년 만에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이 지나온 격동의 근현대사를 써내려 온 주역이다. IMF까지 극복한 엄마 세대의 고단했을 과거는 폭풍 속에 거침없이 쓸리고 떠밀리는 고난의 연속이었으리라.

 

40대인 나의 20~30대가 아무리 힘들었어도 엄마 세대의 그늘 아래 그들의 보호가 우산이 되고 울타리가 되어 늘 존재했으니까. 그래서 가난했지만 덕분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하고 재밌는 건, 겨울 외투를 벗어준 그날 이후 엄마는 평생 동안 옷 걱정하지 않고 살았다고 하셨다. 마치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건 순전히 100% 엄마 입장에서 주관적 의견일 뿐이지만.

 

나 또한 돌이켜 보면 베풀기 좋아하는 천사표 엄마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과 도움과 선의를 무수히 많이 받았다. 아빠의 빈자리를 못 느낄 만큼 주변에 다정한 이웃사촌, 삼촌과 이모들이 늘 넘쳐났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순수한 호의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가치가 있다.

 

혼자일 때도 외롭지 않고 내가 누군가를 도우면 그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돕고 그런 선의가 선순환해서 언젠가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라는 믿음. 이건 엄마가 나에게 체득하게 만든 당연한 가치였다.

 

어쩌면 내가 가진건 쥐뿔도 없지만 늘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근본이 아닐까?

 

이건 모두 엄마의 유산이다. 그래서 덕분에 감사하다. 비록 가난할지언정 마음만은 넉넉한 것까지.

 

더불어 현재는 더 이상 배 고프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할 수 있으며 욕심만 내려놓으면 충분히 만족스럽고 편안한 삶을 살고 있기에 더 바랄 게 없다.

 

부디 엄마를 비롯한 우리 부모 세대에게 남은 여생이 편안하기만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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