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에 걸쳐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글로리> 16편을 몰아봤다. 남들 다 볼 때도 보지 않고 완결까지 기다렸다. 인내는 썼지만 열매는 달고 시원하고 통쾌했다.
전날 새벽까지 졸음과 싸워가며 시청을 이어가다 드디어 끝을 봤다. 동은이와 이모님, 여정선배 등 주인공과 등장인물들, 심지어 악역들에게까지 감정이입 되어 울고 웃고 고통스럽고 또 환희에 차기도 했다.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숨 쉴 틈 없이 널뛰었다. 다채로운 수많은 감정들로 온통 뒤흔들렸다. 파트 1에서 주인공 동은이가 자신에게 학교폭력을 주도한 연진이 무리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 이유가 처절할 정도로 공감할 수 있게 그렸다면 파트 2에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잘못인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연진이 무리들이 서로 자승자박 하며 파멸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과 18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복수의 판을 짠 동은의 계획들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주조연 인물들의 서사를 따라가며 진행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역동적이었고 드라마를 보는 내내 숨차게 몰입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16편에서 그동안 뿌려진 떡밥들이 빠짐없이 회수된다. 악인에게 철저한 단죄는 속이 뻥 뚫릴 만큼 통쾌해서 아쉬움조차 남지 않는 꽉 찬 마무리였다. 바라 마지않는 완벽한 엔딩이었다.
18년 동안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복수를 준비해 온 문동은(송혜교)은 18살, 학교 복도에 망연자실 서있던 피해자에서 벗어나 드디어 19살이 되었다. 오로지 복수만 바라보고 흐린 미소조차 거부하며 살아온 피해자였던 그녀에게 멈춰있던 삶의 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 드디어 자신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듯했다.
복수 끝에 허무를 견디지 못한 것인지, 아님 복수라는 '유일한 동력'을 잃어 살아갈 이유까지 잃은 것인지. 18살 동은이가 과거 어느 날 괴로움에 등 떠밀려 서있었던 폐건물 옥상 난간 끝에, 복수를 끝낸 어른 동은이 다시 위태롭게 서게 된다.
그렇게 모든 걸 뒤로 하려는 순간, 누군가 애타게 살려달라 소리쳐 도움을 구한다. 그녀는 여정선배의 어머니인 주병원 원장이었다.(이 장면은 작가의 말마따라 개연성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인 판타지와 같은 장면이지만 동은이의 끝을 허망하게 끝내지 않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한다.)
그녀는 동은에게 목놓아 울며 외친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여전히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선량한 피해자인 아들을 지옥에서 구해달라고 한다. 어머니로서 처절한 주원장의 외침에 결국 동은은 난간에서 내려온다. 그렇게 여정선배의 '망나니'가 되어 복수를 돕기로 마음을 먹으면서 위태로웠던 동은의 삶은 연장된다.
동은은 18살 넝마가 된 여고생일 때 물속에 몸을 던진 순간에도, 18년 후 모든 복수가 끝나 홀로 자살하려는 순간에도 '좋은 어른'들이 그녀를 구해주었음을 깨닫는다. 가장 힘들고 바닥일 때 자신 옆에도 훌륭한 어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깨달은 동은의 내레이션은 희망적이다.
물에 빠진 자신을 건져주고 도리어 생명의 은인이라 말했던 빌라 주인, 외면하지 않고 도우려 했던 양호선생님, 아이를 끝까지 사랑하고 보호한 어머니들인 이모님과 수희(또 다른 학폭피해자) 어머님을 떠올렸다. 딸을 버린 연진이 엄마, 가해자이기도 한 동은이 엄마와 달랐던 훌륭한 어른들이 손 내밀어 준 구원의 순간들로 인해 살아남았음을 깨닫는다.
다양한 사람들의 응원과 조력으로 18살 피해자 동은이는 드디어 고통에서 벗어나 치유의 길, 새롭게 나아감을 향해 가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처럼 복수를 위해 처절하게 모든 것을 희생하고 대가를 치러 가며 남김없이 불태워 없애는 방법이 아니다.
사소하게 벌어지는 평온한 일상을 온전히 느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문동은의 18년에 걸친 복수극은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비록 사랑하는 이를 구원하기 위해 복수 조력자로서 본격적인 시작으로 드라마는 끝을 맺지만 더 이상 슬프지도 처절하지도 않다. 둘이어서 다행이다. 그들이라면 새로운 복수극 끝이 지옥이어도 찬란한 영광이리라.
아쉬움 하나 없이 만족스러운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꽉 찬 결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만족스러웠던 건, 악인들에게 미적지근한 용서가 아닌, 가차없이 내려진 완벽한 처벌과 죽음이었다. 후련했다. 피해자들 대신 더 화내고 슬프고 억울하고 답답했기에 체한 듯 막혀있던, 검게 그을려 진득한 감정이 해소된 느낌이었다.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아래 단락은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드라마를 못 보신 분이라면 넘어가 주세요.
동은이 수감 중인 연진이를 만난 장면에서, 연진이 억울하게 살인죄를 뒤집어쓴 진실을 끝까지 말해주지 않음으로써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반전 상황도 심연 속 밑바닥 어두운 감정까지 건드려질 정도로, 저열하고 치명적인 단죄였다. 왜 자신이 억울해하냐고 분노에 찬 연진이 끝까지 알 수 없어 두고두고 스스로를 괴롭힐 진실 한 조각, 힌트조차 남기지 않은 동은을 지켜보며 이보다 완벽한 단죄가 어디 있을까 감탄해 마지않았다. 역시 믿고 보는 김은숙 작가의 탁월한 한 방이 아닌가!
장장 16시간 동안 나를 장악한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한참 동안 여운이 남아 벗어날 수 없었다. 내 영혼을 뒤흔들고 마음에 폭풍이 몰아쳐 넝마처럼 피폐해질 찰나, 시원한 사이다 같은 단죄와 처벌에 통쾌해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드라마보다 잔혹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대변하는 뉴스나 사건사고들로 인해 탄식할 뿐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 '학교폭력'과 '유전무죄'와 같은 사회불평등과 부조리가 화두로 떠올랐다. 피해자 입장에서 처절하게 간접 체험함으로써, 가해자뿐 아니라 방관하고 외면하는 사람도 공범이라는 것을 다시금 뼛속깊이 깨달았다. '학교폭력'이 단순히 어리고 치기 어린 일탈이 아니라 누군가의 생명과 존엄마저 빼앗는 영혼의 살인이 될 수 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부디 동은이 같은 피해자들이 더 이상 트라우마와 고통 속에 외롭게 남겨져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다른 동은이가 외면당한 채 학교 복도에 외롭게 서있지 않기만을 바란다.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 자신의 일상을 찾고 인생을 살아나가길 바랄 뿐이다. 바라건대 단 한 명이라도 좋은 어른이나 친구가 옆에 존재해서 한 편이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누구라도 최소한 외면하지 않기만 바라마지 않는다.
동은이의 18년에 걸친 복수극을 지켜본 목격자로서, 피해자 입장에서 '학교폭력'에 대해 더 깊이 공감하고 고민하면서 더 이상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만들 방법을 찾고 실현될 수 있도록 일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이 드라마로 인해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SNS로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고 가해자가 사죄하는 등 국내외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현상이 드라마의 인기가 사그라들더라도 거품처럼 꺼지지 않고 두고두고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공동의 과제가 되길 바란다. 완전히 사라지진 못해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나 울타리만이라도 존재하길 바라며, 혹시 마주칠 또 다른 문동은에게 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했듯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숙제를 남긴 드라마였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깊은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 선한 영향이 계속 힘을 얻어 전파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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